이승소는 양성이씨 11세로 자는 윤보(胤保). 호는 삼탄(三灘).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조선조 세종으로부터 성종까지 6조(朝)에 걸쳐 출사했던 집현전 출신의 뛰어난 학자요 문장가이자 정치·외교가이다.
17세에 진사시와 1447년 문과 및 중시에 장원급제 한 보기드문 수재로 집현전에 들어가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하고 여러 벼슬을 지내고 예문관제학·충청도 관찰사·예조·이조·형조판서 등을 거쳐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양성군(陽城君)에 올랐다.
학문이 정심하여 예악·병형·음양·의학·지리 등에도 밝았을 뿐 아니라 인품이 뛰어나 ‘금옥군자(金玉君子)’로 칭송되고 당대의 사문영수(斯文領袖)로 추앙받았다. 중국에 두 번이나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중국·일본·여진 등과의 외교분야에서도 대내외로 왕명을 받드는 문서가 거의 그의 손에서 나왔고. 또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하였다. 그의 심오한 학문과 시문은 『삼탄집(三灘集)』에 잘 나타나 있다. 평생을 맑은 지조와 넓은 도량으로 청탁이 통하지 않는 청렴결백한 인격을 견지했다.
1484년 63세로 세상을 떠남에 남은 재산이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거관청간(居官淸簡)의 모범을 보여준 것이며 한시문학(漢詩文學)의 독창적 시풍과 더불어 만인의 칭송을 받았다. 이 영정은 종손인 이용신(李庸信)씨의 딸 이순(李順) 화가가 1986년 12월 30일 완성하여 1987년 5월 3일 청간사 낙성때 봉안했다.